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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각 쁘레시디움 별로 행하게 되어있는 레지오 야외행사를 이번에는 꾸리아 산하 전 Pr이 같이 명례성지로 갔었습니다.
명례는 우리 지역의 순교 성지이며 본당 주임신부님의 어릴적 고향입니다.
신부님의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이전부터 신앙생활을 하셨던 곳입니다.

◆ 명례성지
마산교구 최초의 본당으로 순교자 신석복 생가가 있는 곳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남쪽에 밀양과 김해를 잇는 강변 마을 명례는 나루에 걸맞게 예로부터 외지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고 경제 활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차츰 도로가 확충되고 배를 사용하지 않게 되면서 마을의 규모는 작아지고 번성했던 모습을 역사 속에 뒤로한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잊혀 갔다.

명례성지는 일찍이 신앙촌이 형성된 곳이며 124위 시복시성 대상자 중 한 명인 순교자 신석복(申錫福, 1828~1866, 마르코)이 태어난 곳이다. 하지만 이곳 명례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많은 의미가 있는 곳이다. 현재 마산교구의 관할 지역에서는 가장 오래된 최초의 본당이고 경상도 전체에서 개항 이후 네 번째로 설립된 본당이다.
일설에는 명례에 신자들이 처음 나타난 것은 정해박해(1827년) 이후로 박해를 피해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강 건너 김해시 한림면과 생림면에 살던 교우들과도 교류를 가졌으며 병인박해 때 많은 교우들이 잡혀 갔지만 박해 후 다시 모여들었다.
명례 본당은 개항 이후 경남 지역 첫 본당인 부산 본당 주임 파리 외방전교회 죠조(Jozeau, 趙得夏, 1866~1894, 모세) 신부의 사목 방침에 따라 경남 중부 지역에 본당을 신설해 부산의 서쪽을 전담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신자들의 열망으로 명례 공소는1897년 6월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초대 주임으로 강성삼(姜聖參, 1866~1903, 라우렌시오) 신부가 발령받게 되었다.
1897년 본당으로 승격됐던 명례는 신자들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현재의 위치에 부지를 매입했고 강성삼 신부는 그 땅에 네 칸짜리 집을 지었다. 이후 1926년 새로 부임한 권영조(權永兆, 1901~1965, 마르코) 신부가 기와로 된 성당을 지어 1928년 낙성식을 가졌지만 아쉽게도 이 성당은 1935년 태풍으로 전파되었다. 지금의 성전은 1938년 무너진 자리에 축소 복원한 것이다.
그러나 명례에는 역사적으로 소중한 자료들이 많다. 처음 본당이 설립되어 사용한 제대와 십자가, 남녀 신자석이 칸막이로 분리되어 있는 내부는 초기 신자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명례는 시복시성 대상인 신석복 마르코 순교자의 생가터(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1209)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1828년에 태어난 그는 농사를 지으며 누룩과 소금 행상을 했고 피난 교우들의 권유로 신자가 됐으며 병인박해 때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혀 1866년 3월 31일에 순교하였다.

◆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1828-1866년)  <하느님의 종 124위>
경상도 밀양의 명례(현 경남 밀양읍 명례리) 사람인 신석복 마르코는 장사를 하면서 생활하던 신자로,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창원 마포로 장사를 나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오 야고보 등과 함께 대구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때는 마르코가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해온 지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포졸들은 밀양에서 하루를 머무는 동안 마르코에게 무수한 형벌을 가하였다. 그런 다음 그를 대구로 끌고 갔는데, 이때 그 사실을 알게 된 그의 형제들이 돈을 마련해 가지고 대구로 가는 일행을 뒤 쫓아 갔다. 그들 일행을 만난 마르코의 형제들은 포졸들과 수작한 뒤, 마르코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그는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대구로 가는 동안 자주 능욕을 당해야만 하였다. 대구에서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 유혈이 낭자하고 뼈가 부러지게 되었다. 그런 다음 며칠을 옥에 가두었다가 1866년 3월 31일(음력 2월 15일) 교수형을 집행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이후 마르코의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찾아다 고향에 안장하였다.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http://www.paxkorea.kr/) 발췌

* 요한아~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2-14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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