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용잠성당 사이트내 검색

알림

2024 . 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당일일정: (Mon May 20, 2024)
pln_no_event
요일 새벽 오전 오후 저녁
       
      19:30
  10:00    
      19:30
  10:00    
    18:00
주일 07:00 10:30  

교리반 안내
구 분 요 일 시 간
낮반
저녁반    
오늘:
0
어제:
0
전체:
91,074

누가 기도하지 않고 살 수 있는가

2009.05.18 16:10

서창근(요한) 조회 수:917

시간은 항상 지나가 버린다는 사실을  저는 항상 생각하고 또 두려운 것으로 느낌니다.
그런데 지금 이순간이 빨리지나가 버렸으면 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 천국을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천국이 없다고들 말씀하십니다.
아직은 저에게 그런 천국의 느낌은 없었습니다......ㅠ.ㅠ
사랑의 느낌도 없었습니다.
그럼 당연히 사랑이신 하느님도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것을 하소연 했더니
정말 내가 절실히 원했는지 생각해 봐랍니다.
정말 자신이 없었습니니다.
아마도 지금을 열심히 살지 못해서  인가 봅니다.

가톨릭 신문을 보고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사나보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것들이 또 나를 절망케도 합니다.
좀 유명한 사람들은 나보나 나은 생각 혹은 세계를 감지하고 있었으면 하는 바램때문입니다.
비록 나는 잘 모르지만 유명한 사람이나 성인,성녀께는 확신이 있어 나는 그냥 눈에보이는 그 사람에 의지하고 싶어인 것같습니다.


[신달자의 주일 오후] 누가 기도하지 않고 살 수 있는가

첫딸 태희가 연애를 할 때 나도 덩달아 연애를 하는 것 같았다. 태희가 만나는 남자가 있다고 했을 때, 내 머릿속에는 언제나 그 남자가 어른거렸다. 버스를 타고 지나며 ‘거리의 저 남자처럼 생겼을까’, ‘내 옆자리에 앉은 이런 남자를 닮았을까’ 등등 마치 내가 연애를 하듯 설레고 그 남자의 얼굴이 궁금했다.

태희는 그 남자와 결혼했고 곧 첫 아들을 얻었다. 나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고, 세상의 어떤 무엇도 부럽지 않았다. 세상의 좋은 것은 전부 그 아기에게 다 주고 싶었다. 너무 사랑스러워 꿈속에서도 아기를 안고 있을 정도였다.

태희가 연애할 때 나도 연애를 하듯, 아기가 태어나자 나 역시 새로운 연애에 빠져든 것이다. 내 일찍이 이런 연애를 한 적이 있었던가. 나는 아기 옆에서 떠날 줄 몰랐고, 아기가 보고 싶을까봐 외국여행도 미루곤 했다.

누워있던 아기가 혼자 기어 다니더니 직립으로 일어섰다. 우리는 “와! 와!” 환호성을 지르고 “섰다! 섰다!”를 외치며 좋아했다. 마치 우리 아기만 세상에서 일어서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아기가 기어 다니고 일어설 때, 엄마 태희는 늘 앞서 있었다. “언제쯤 걸을 수 있을까?” 걷기만 한다면 더 이상의 걱정이 없다는 딸의 표정은 너무나도 진지했다. 아기가 걷기 시작하자 태희의 소망은 다시 앞서 가기 시작했다. “언제쯤 유치원에 보내야 할까?”

그렇게 태희는 아기를 얼른 어른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태희야,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나는 몇 번이고 충고를 했다. 지금 우리 아기는 결코 다시 이 순간을 가질 수 없음을. 어렵고 힘들지만 이 순간의 모든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함을.

그러나 태희는 생각이 달랐다. 조금 시간을 당겨오면, 조금 더 편해질 것처럼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지금이란 시간적 공간이 늘 힘들었을 게다. 태희는 아이가 초등학교를 다니는 엄마, 졸업시키는 엄마, 다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보내는 엄마를 부러워했다. 이제 나의 애인이자 우리 집안의 첫 손자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됐다.

모든 시간은 억지로 당기지 않아도 이렇게 오고 마는 것이다. 아마도 태희는 고등학생 엄마 노릇이 너무 힘들어 아들이 얼른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해 자신의 짐을 덜어주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아침마다 영양식 식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하고, 성적에 모든 귀를 기울이며, 늘 가슴을 두근거리고 잠도 제대로 못자고 서성이는 지금의 불안과 피곤을 털어버리고 싶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어느 대학 입학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용실을 다녀와 무슨 옷을 입을까 고민하고 싶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만 넘기면 아름다운 세상이 올 것이라는 태희의 생각이 과연 웃음을 줄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속도로 흘러간다. 빠르고 느린 것은 사람마다의 느낌인 것이다.

시간 줄을 팍팍 잡아당기지 않아도 우리 손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대학에 입학할 것이다. 그때 가서야 태희가 이제는 시간이 좀 천천히 흘러가도 좋다 해도, 시간은 절대로 태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대학생이던 손자는 군대를 다녀오고, 학교를 졸업하고, 여자를 만나고, 결혼을 할 것이다. 내 딸 태희도 나같이 곧 손자를 보게 될 것이다. 이름 그대로 ‘할머니’가 될 것이다. 그때 태희에게 “왜 그렇게 시간이 빨리 가기를 소망했니?”라고 묻는다면, 그는 무어라고 답할까. 그 순간의 내 딸이 너무 안쓰럽다.

나는 늘 말한다. 고통은 좋은 것과 함께 오고, 고통이 사라지면 좋은 것도 함께 가버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완전한 고통도, 완전한 기쁨도 없다는 것이다. 고통은 인생이란 음식의 간을 맞춰주는 소금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가져야 할 기도의 제목이다.

이렇게 결코 시간을 멈추지 못하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오직 기도뿐이다.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자꾸 저 먼 곳으로 간다. 어찌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살 수 있겠는가.

나는 진심으로 내 사랑하는 딸에게 바란다. 우리 태희가 지금은 고단하고 지치더라도, 오늘의 시간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고통을 즐기며, 가장 어려운 순간에도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는 지혜로운 여성이 됐으면 한다. 그리고 하나 더. 태희가 ‘기도하는 엄마’이기를 바란다.

가톨릭 신문에서 퍼 왔습니다.

천주교마산교구 용잠성당 | 경상남도 창원시 동읍 의창대로 919
사무실 055-251-2210 | 팩스 055-251-2316 |